김시습의 나이는 고작 3살 이였다고 한다. 아마 이 기억이 용궁부연록을 만들지 않았나 싶었다. 죽은 자신의 주군을 향한 추억과 아품이 느껴져 뒤도 안 돌아보고 산 속으로 가버렸다는 이야기에 안타까움이 들었다.
나는 금오신화를 통해 한국 고소설이 결코 지루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어려
신화의 비교를 중심으로
『금오신화』의 『전등신화』 모방설은 김안로(연산조 1481-1537)를 필두로 하여 시작되었다. 김안로는 『금오신화』의 내용이나 체제가 『전등신화』의 그것과 비슷함을 들어 모방설을 주장했는데 그가 지은 『용천담적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동봉 김시습이 어
김시습이 방외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관인 문학과 달리하는 점으로 미루어 북한 문학이 안고 있는 백성의 문학과 공통점이 있다.「금오신화」를 이해하는 데는 그 작자를 이해해야 할 것이며, 그 작자를 이해하려면 그 작자가 생존했던 시대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4대 世宗大王이 돌아가시고, 세종의
김시습금오신화의 정의
이 금오신화는 이조 단종 때 생육신의 한 사람인 동봉 김시습의 작품이며 원전은 한문소설이고 모두 다섯 편으로 되어 있다. 이 금오신화는 낙천 불우한 사상의 표현인 동시에 그 형식적인 면에 있어서는 중국 교우의 「전등신화」를 모방하였으나 그 인물이나 지리적 배경
김시습금오신화의 의미
조선 전기에 김시습(金時習)이 지은 한문 소설집. 한국 전기체 소설(傳奇體小說)의 효시이다.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등 5편이 수록되어 있다. 원래는 이 5편
금오산에 은거하였음은 잘 알려져 있다. 이 몇 년간의 유랑길은 분명 김시습에게 많은 견문과 사색의 개기를 마련해주었을 것이며 그리하여 금오신화의 창작배경을 구상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김시습의 개인사적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금오신화를 해석해야 한다
하는 현실에 그의 육체와 정신은 더욱 심각한 괴리를 느끼게 된다. 결국 그는 이러한 괴리를 견디지 못한 그는 세속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금오산으로 들어간다. 그는 그 속에서 <금오신화>를 지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창작된 <금오신화>는 분명 자신의 이런 고민이 분명히 투영되었을 것이다.
Ⅰ. 개요
김시습의 세계관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일원론적 주기론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애초에는 주리론에 정통했지만 세조의 왕위 찬탈 이후에 그의 세계관을 수정하게 된다. 금오신화 등의 소설작품이 아닌 그의 논설에는 주기론이 구체적으로 이론이 제시되고 있으며 이
과거 실패, 그리고 패도의 등장 등으로 말미암아 깊은 좌절을 겪고 있다. 이것은 금오신화의 각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들의 성격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바라고 하겠다. 매월당은 삼각산 중흥사에서 수학 독서하다가, 21세 되던 해에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권을 잡았다는 소문을 듣고는 즉시 머리